접속만 해도 가슴 벅차던 그 시절의 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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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만 해도 가슴 벅차던 그 시절의 천리안
  • 편집부
  • 승인 2010.10.1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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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을 시작으로 1980년 후반부터 약 10년은 하이텔, 케텔, 나우누리, 유니텔 등 PC통신의 시대였다. 국내 IT 산업의 초석을 다진 이 공간은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KT 하이텔이 2007년 2월 28일로 문을 닫으며 PC통신 서비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중 선두주자였던 천리안 25년 역사를 되짚다 보니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채팅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먹고 먹히는 천리안의 변태과정  
PC통신 대표 주자였던 천리안은 1982년 설립한 한국데이터통신의 서비스다. 1984년 5월에 한국데이터통신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해 1985년 9월에 PC통신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 등에서 업무용으로만 PC를 이용했으니 따지고 보면 개인서비스의 시초인 셈이다. PC통신은 전화 모뎀으로 서로 자료를 주고받거나 방을 만들어 대화를 주고받는 서비스다. 이용자들은 중간에서 엮어주는 다리가 바로 천리안과 하이텔 같은 PC통신이다.

PC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라 느린 속도와 1만 원의 요금, 이용한 정보에 붙는 정보이용료를 따로 내야 됨에도 파란화면에 빠져드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하이텔(1989년 11월 케텔 → 1992년 코텔 → 1992년 7월 하이텔), 나우누리(1994년), 유니텔(1996년)이 연이어 등장했고 PC통신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1997년, 천리안은 유료 가입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 다른 통신사도 호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한창 늦은 1997년 SK가 넷츠고, LG는 채널아이로 PC통신 시장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용자가 더욱 넓은 세상, 바로 인터넷에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1991년 회사명을 데이콤으로 이름을 바꾼 한국데이터통신은 1998년 한컴이 개발한 한글검색엔진 ‘심마니’와 ‘씨넷’을 인수하며 변화를 모색한다. 하지만 변화의 성과를 내기도 전에 LG에 인수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LG인터넷의 채널아이와 천리안은 혼란을 겪으며 이용자들은 하나둘씩 등을 돌리자 LG는 채널아이 서비스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2002년 LG가 설립한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DMI)이 천리안과 심마니 사업부를 넘겨받은 뒤, 2003년 3월 두 서비스를 통합해 심마니 CHOL을 출범시켰다. 천리안이 PC통신 꼬리표를 떼고 웹 기반의 인터넷 포털 서비스 업체로 변태를 마친 순간이다.

천리안은 e메일, 커뮤니티 등 기본 서비스와 일부 유료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웹 기반 유/무료 회원제를 도입했다. 게임 포털인 고인돌스까지 더해 3개 사이트가 통합된 CHOL은 초기에 잠깐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 환경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신생 인터넷 기업과 치러야 했던 생존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태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문화의 요람이 된 PC통신 시절의 추억

천리안의 역사를 뒤적이다 보면 PC통신 시절 어마어마한 요금 때문에 웃지 못 할 추억을 떠오르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번개를 맞으려고 종로 YMCA와 강남역 뉴욕제과 앞을 지키던 일도 생생하다.

■10만 원을 훌쩍 넘긴 전화요금
회사에 다녀온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하루 종일 통화중이라고 역정을 내기도 하고, 몇 십만 원이 훌쩍 넘는 전화요금 때문에 많이 혼나기도 했다.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이었기 때문이다. 파일을 받다가 누가 전화기라도 들면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해서 불편했던 기억도 있다.

천리안 통신비는 정액제가 아니었고, 데이터 전송속도도 56Kbps로 무척 느렸다. mp3 파일 하나 받는데 몇 시간씩 걸리던 시절이었다. 자료실을 자유롭게 이용하려면 상당한 재력을 지녀야 했다.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은 월정액인데 반해 천리안은 쓴 만큼 돈을 내는 서비스라서 ‘부르주아의 통신’으로 통했다.

당시 천리안에서는 보관함에 편지나 프로그램을 보관할 때 1,000자에 하루 9원을 받았다. 1MB의 파일을 한 달 정도 보관하면 대충 30만 원 가까이 나오는 셈. 초보자들은 자료실에서 받은 게임이나 친구들이 보내준 게임을 일단은 모두 보관함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몇 백만 원 짜리 고지서를 들고 울며 겨자 먹기로 PC통신을 끊기도 했다. 천리안 이용할 때 반드시 알아둬야 할 주의사항이었다.



PC통신 시절 천리안 대문.

■ATDT 01421을 아시나요?
PC통신은 지금의 인터넷처럼 PC를 켜고 아이콘을 클릭한다고 무조건 접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리안을 이용하려면 접속 프로그램인 ‘이야기’를 띄운 다음 ‘ATDT 01421’을 입력해야 신호음이 들리며 파란 화면에 하얀 글자들이 쭉 떴다.
경북대학교 컴퓨터동아리 하늘소가 만든 PC통신 에뮬레이터(어떤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다른 종류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로 모방하여 실현시키기 위한 장치나 프로그램)인 이야기는 PC통신 세대를 구분하는 단어로 꼽힐 만큼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이 외 새롬 데이터 통신 같은 후발주자도 있었다. 

흔히 BBS(Broadcast Bulletin board System)라고 부르던 PC통신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맞지만 다른 서비스와는 단절되어 있어 서비스마다 아이디를 따로 만들어야 했고, 접속하는 통로도 달랐다. 014XY 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생활전호번호부에 나우누리 ‘01443’, 유니텔 ‘01433’, 천리안 ‘01420’ 등 접속 고유번호가 안내될 정도였다. 정액제를 쓰는 PC통신은 친구의 아이디를 빌려서 활동하는 일도 많았다. 


PC통신 대표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인 ‘이야기’.

■채팅에 대한 환상
1997년에 나온 영화 <접속>에는 PC통신 세대의 삶이 담겨있다. 익명으로 상대방과 채팅하며 서로를 상상하던 그 당시의 추억. 이미지나 영상이 전혀 없고 텍스트만 주고받던 채팅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화면 너머의 주인공이 한석규와 전도연
이길 바라며 갑작스러운 만남인 ‘번개’가 유행하기도 했다.

PC통신은 채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느린 속도에서 영상이나 그림을 주고받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텍스트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했고, 이모티콘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문자를 이용했다. PC통신은 유료 서비스라 별명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익명은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채팅 예절이 좋은 편이었다. 채팅으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게이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머드 게임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신의 손>이란 게임은 컴퓨터 교육 과정이 마련된 교육기관이 경진대회를 주최할 만큼 인기였다.


<접속>은 당시 PC통신 세대를 대변하는 영화로 큰 사랑을 받았다.

■커뮤니티의 원조 PC통신 동호회

PC통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호회다. 등산, 사진, 바둑 등 다양한 주제의 동호회가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모임에 빠져들었다. 특히 인기가 높았던 것은 ‘천일야화’나 ‘검과 마법’ 같은 소설 동호회다. 동호회에 올라온 소설이 책을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유명 회원은 드라마 작가로 진출하기도 했다. PC통신 시대의 동호회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의 나누던 문화와 추억은 인터넷 카페와 커뮤니티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포털 사이트로 완전 변태를 꿈꾸다

2007년 8월 천리안은 ‘천리안 2.0’으로 이름을 바꾸고 완전한 포털 사이트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회원과 무료회원 구분 정책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정회원에게는 10GB의 이메일 용량과 디스크팟 200MB, 영화보기 무료쿠폰, 매달 25건의 무료 문자 등이 제공된다. 무료회원도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e메일 용량 제한 등의 차이가 있다.

천리안 2.0은 메일 중심의 커뮤니티 포털 사이트라고 말할 만큼 이메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PC사랑 독자 가운데도 천리안 메일을 쓰는 사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2002년에 이미 3D 아바타 메일 서비스를 시작하고, 외부 메일을 한 번에 열어 볼 수 있는 무한수신 서비스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은 천리안을 30~40대를 중심의 전문 비즈니스 포털 사이트로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이메일 서비스 확대에 힘쓰고 있다.

PC통신 서비스는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나우누리

안정적인 접속과 빠른 속도로 이용자를 모았던 나우누리는
PC통신 가운데 가장 먼저 14.4kbps로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이후 나우누리는 2006년 나우콤에서 분사한 나우에스엔티가 운영을 맡아 뉴스와 게시판, 클럽 등을 운영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로 운영 중이다.

하이텔

케텔과 코텔을 거쳐 꾸준하게 사랑받은 하이텔은 마지막까지
PC통신 서비스를 유지했다. 현재 하이텔을 검색하면 포털 사이트 파란으로 연결된다.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 <디시인사이드>의 김유식, <도깨비 뉴스>의 김현국 등의 유명인이 하이텔 동호회 출신이다 

넷츠고

SK
텔레콤이 운영한 서비스였던 만큼 PC통신 시대가 내리막길을 걷던 2002년에 자사 포털 사이트인 네이트에 흡수되었다. 자사 브라우저를 이용해 인터넷과 통신을 함께 즐길 수 있던 것이 특징. 

유니텔

1996
년 삼성SDS에서 개발한 PC통신. 다른 PC통신이 가상 터미널 서비스를 이용했던 것과 달리 유니윈이라는 이름의 전용 클라이언트 이용했다. 인터넷 3시간 공짜서비스를 장점으로 부각시켜 회원을 모집한 것이 특징. 현재 커뮤니티에 중점을 둔 포털 사이트로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취재후기
누리꾼에게 순수함이 묻어났던 그 때

인터뷰를 하러 가면 ‘PC사랑 아직도 나와요?’와 ‘오랜만에 보네요’란 말을 종종 듣는다. 15년차인 우리도 이럴진대 천리안은 더하다. 벌써 25년. 그나마 PC통신 세대가 IT 분야에 많이 진출해 있어 당시 이야기를 듣긴 어렵지 않았지만 ‘천리안 아직도 있어요?’ 질문은 빠지지 않았다. 이름은 같으나 모습은 그때와 천지차이다. PC통신 시대가 막을 내린 가장 큰 이유가 초고속 인터넷 등장 때문인 건 맞지만 어차피 서비스 기반이 달라서 변화를 모색했어도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터넷사이트와 전자책의 유혹을 받는 우리와 동질감이 느껴져 웬지 씁쓸하기도 했다. PC통신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지 천리안은 이번 기사 진행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기자는 PC통신 시대의 끄트머리에서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천리안의 과거를 추적하며 그때의 추억을 즐겁게 되새길 수 있었다. 이번 비하인드스토리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없다. 대신 모두가 지금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천리안 25년史
1985년 PC통신 천리안 서비스 시작

1997년 채널아이 서비스
채널아이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멀티미디어 통신서비스다. 다른 PC통신과는 다르게 전자상거래와 광고서비스 등으로 차별화 전략을 세웠다. 초고속인터넷 보급과 맞물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데이콤 밑에서 천리안과 짧은 시간 함께 했다.

1998년 6월 한글검색엔진 '심마니' 서비스 인수.

1999년 심파일
심마니 부가 서비스였다가 독립한 자료실 사이트. PC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소프트웨어는 물론 게임, 여러 분야의 사진, 음악, 동영상, 문서 등의 자료가 많았다.

2000년 3월  DMI(데이콤 멀티미디어인터넷) 설립.

2003년 3월 통합포털 www.CHOL.com

2001년 2월
채널아이 서비스 통합
채널아이 서비스가 천리안과 통합되었다. 이듬해 3월에 DMI는 심마니를 인수하고 천리안과 심마니, 게임 포털사이트 고인돌스를 합쳐 CHOL를 출범시킨다.

2008년 LG데이콤 IPTV 콘텐츠 공급과 운영 계약 체결

2009년 SNS 미니블로그 서비스 팅플(Tingple.com) 오픈

/PC사랑 황재선 기자 rw0730@ilovep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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