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 강국의 몰락 - IT 기업의 숨은 족보 이야기 12 프리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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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 강국의 몰락 - IT 기업의 숨은 족보 이야기 12 프리챌
  • PC사랑
  • 승인 2009.05.2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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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조 game.freechal.com

2001년 게임맥스를 인수해 만든 온라인 게임업체 드림챌이 세운 게임 포털이다. 게임 전적이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마이노라조’, 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타운’, 커뮤니티와 개인별 순위를 표시하는 ‘순위보기’, 아바타 의상을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몰’을 갖추고 서비스를 시작했다. 게임에 커뮤니티를 결합한 노라조는 자신이 가입한 커뮤니티와 연결한 채널을 통해 자신들만의 게임존을 만들 수 있다. 대표작은 <고고레이싱>이다. 2006년 본격적인 게임사업 진출 선언과 함께 ‘프리챌 게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별다섯개 만점에 세개
게임 자체에 특별히 트집을 잡을 것은 없지만 유저들은 많지 않다. 킬러 게임이 없으니까. 고정적으로 유저들을 유혹하는 게임이 없으니 웹보드나 이런 캐주얼게임들도 유저가 없을 수 밖에.

1999~2001년
1999년
4월 자유와 도전 설립
2000년
1월 프리챌 오픈
4월 프리챌로 사명 변경
2001년
2월 게임맥스 인수
5월 게임서비스 ‘노라조’ 오픈
6월 아바타 서비스 오픈
12월 마이홈피 서비스 오픈

파일구리 www.fileguri.com


2002년, 프리챌 개발 본부장인 장규오 이사가 4개월 동안 매달려 만들어낸 효자 상품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 다양한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서로 주고받는 파일 공유 프로그램이다. 하나의 파일을 1명의 이용자에게 전송 하는 형식이라 개개인에 따라 전송속도와 안정성이 다르다. 네트워크가 빠르고 안정적인 이용자를 만나면 속도도 빠르고 안정적이다. 2006년에 합법적인 음원 유통 서비스를 오픈했고, 2009년 4월에 합법적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 오픈이 예정되어 있다.

별다섯개 만점에 세개
회원들끼리 필요한 파일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어 골수 팬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용자의 동의없이 설치되는 툴바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삭제를 해도 접속할 때마다 생기니 이용자의 짜증이 늘어난다.

2002~2005년
2002년
10월 P2P 서비스 ‘파일구리’ 오픈
12월 맞고 고스톱 게임 정식 서비스 오픈
2003년
3월 솔본 자회사 편입
2004년
4월 훌라 게임 서비스 오픈
 프리첼, 머니챌 합병
2005년
10월 프리챌 메인 개편
 프리 톡톡(엔터테인먼트 게시판) 오픈

프리챌 동영상 서비스 q.freechal.com

포털 사이트 최초로 실시한 동영상 서비스다. 동영상·블로그·인맥형성·게임·개인방송국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 동영상 데이터베이스(DB)를 확보한 전문 사이트와 제휴해, 단순히 검색에 노출시키는 서비스가 아니라 이용자가 동영상을 무제한으로 업로드할 수 있는 용량을 제공하는 동시에 실시간 커뮤니케이션과 인맥형성까지 가능하다. Q서비스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며 프리챌이 동영상 포털 사이트로 바뀌는 기초가 된다.

별다섯개 만점에 세개 반
동영상 서비스를 오픈하면서 동영상 자체 서버를 이용해 용량도 크고 속도도 빠르다. 저작권을 무시한 콘텐츠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 단점.

2006년
2006년
5월 프리챌 동영상 서비스 Q(q.freechal.com) 오픈 / 맞고야 오픈
8월 프리챌 게임(www.freechalgame.com) 런칭
9월 FPS 게임 <2WAR> 클로즈베타 서비스 오픈
10월 프리챌 커뮤니티 개편
11월 프리챌 Q, 온에어 서비스 오픈
 동영상 폰투웹(P2W) 서비스 오픈
12월 프리챌, 인터넷 히트 사이트 포털 부문 1위 선정 (코리안클릭 선정)
 비브비오컴의 <큐로큐로 온라인> 퍼블리싱

2WAR 2war.freechal.com

신생개발사인 시온소프트가 2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쳐 선보인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에피소드 방식으로 재구성한 게임이다. 그래픽은 괜찮았지만 타격감과 조작성이 부족했다. 2006년 클로즈베타를 시작으로 2007년 오픈베타 서비스로 전환하면서 많은 제작비를 투자했지만 서버 문제 등으로 유저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프리챌이 꼽는 아쉬운 서비스기도 하다.

별다섯개 만점에 두개 반
투워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사실적인 부분들을 잘 구현해냈지만 온라인게임 유저들에게 다소 생소한 콘셉이다. 비슷한 장르였던 서든어택이나 스페셜포스와는 타깃도 달라서 대중성이 떨어진 것도 아쉬운 점.

2007년
2007년 
3월 동영상 데스크톱 플레이어 ‘큐잉’ 오픈
4월 동영상 게시판 Q TV
 동영상 뉴스 서비스 오픈
 동영상 개인미디어 마이 Q 개편
6월 FPS 게임 <2WAR> 오픈베타 서비스 개시
 액션 RPG 스켈레탈하운드 퍼블리싱 계약체결 
 프리챌 CI 변경, 동영상 포털로 전환
11월 시온 소프트 인수해 투기어 게임즈로 사명 변경
12월 정보통신부 주관 디지털콘텐츠 대상 우수상 수상

카르카스 온라인  karcass.freechal.com

2007년 6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액션 RPG 게임 <스켈레탈하운드>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카르카스 온라인>은 왕국을 침략한 악마들에 맞서는 기사들의 모험이 주된 이야기다. 조작이 쉬운 횡스크롤 게임이지만 성인들도 즐길 수 있도록 8등신 캐릭터들의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꾸몄다. 던전에 숨겨진 보물, 비밀 장치, 퍼즐 등을 찾고 풀어내면서 게임을 진행한다. 맵은 2D, 캐릭터는 3D로 개발되었다. 타격감과 화려한 액션, 실감나는 전투 시스템 등 액션 게임의 기본을 탄탄하게 갖추었다.

별다섯개 만점에 네개
베타테스트 3일 만에 3만 명이 모여들었다. 정식 버전이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조작이 쉬운 횡스크롤 게임이 어떤 재미를 가져오는지가 관건이다. 정식서비스에는 더 많은 콘텐츠와 재미를 추구한다니 기대해볼만.

2008년
2008년 
3월 음원 전문 P2P 서비스 ‘송사리’ 정식 서비스
4월 액션 RPG 스켈레탈하운드, <카르카스 온라인> 으로 서비스명 변경
 경희사이버대학교와 산학협력 협약 체결
5월 한국 장애인단체총연맹과 업무제휴 협약 체결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의 디지털콘텐츠
 가치사슬 연계 지원사업 선정
9월 원광디지털대학교와 산학협력 협약 체결
 카르카스 온라인 일본/북미/유럽 진출 
10월 KT와 와이브로 사업협력 협약 체결
 카르카스 온라인 1차 테스트 진행

앞으로의 계획

올해 프리챌은 동영상과 게임 사업에 주력할 예정이다. 개인홈피 마이Q와 오픈게시판인 QTV를 프리챌 닷컴에서 서비스하며 이용자들이 좀더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계획하고 있다. 게임 사업은 올 여름 정식 오픈을 앞두고 있는 액션 RPG <카르카스 온라인>에 집중할 예정이다. 또 IPTV인 메가TV에도 게임을 공급하고 있으며, 프리챌 게임 사이트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웹보드 게임 역시 안정적으로 서비스하는데 노력할 것이다.

2009년
2009년 
1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주관의 ‘제2회 대한민국 동영상 UCC대상’ 개최
 법무부와 건강한 인터넷 문화 만들기 업무협약 체결
3월  <카르카스 온라인> 2차 테스트 진행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 Korea Internet Self-governance Orgnization) 출범

비하인드 스토리  
2009년 4월 19일로 10살이 되는 프리챌은 1~2살 때 지금의 싸이월드를 넘어서는 인기 커뮤니티였다. 프리챌은 경영자의 방침에 회사의 성격이 크게 달라진 전형적인 사례다.

현 프리챌 손창욱 대표.

벤처 기업의 화려한 시작
1999년 4월, 프리챌은 삼성맨으로 10년을 살아온 전제완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전제완은  80년대 PC업계 최대 히트서적 중 하나인 <PC는 내 친구>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부터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경영학도였던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삼성물산에 취직했다. 우연한 기회에 인사팀으로 옮겨가면서 PC와 가깝게 되었다. 인사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료 관리였는데, 많은 자료를 정확하게 관리하고 업데이트하기 쉬운 파일로 만드는 것은 물론 보안까지 신경써야 하니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다른 팀에서 PC가 고장 나면 일순위로 찾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현재까지도 삼성의 인사시스템은 그가 구축해놓은 기반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미국 지사에 연수를 받으러 갔다가 실리콘밸리를 보고 국내 벤처산업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소프트웨어도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의 산업을 예로 들어 가능성을 제시했고, 삼성이 외국 오픈 마켓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벤처 산업에 대한 가능성을 확신한 전제완은 IMF 이후 삼성이 더 이상 벤처에 투자할 뜻이 없는 것을 알고 10년 동안 몸담았던 안정적인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인사팀을 떠났다.

1999년 4월 전제완은 서초구 양재동 뱅뱅 사거리에 ‘자유와 도전’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당시 그를 믿고 함께 삼성에서 나온 사람만 50여명이었다. 검색은 이미 기존 포털이 잡고 있어 전제완은 커뮤니티에 집중하기로 했다. 개인의 정보를 잘 관리하는 그룹웨어가 자신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전제완은 자유(freedom)와 도전(challenge)을 합쳐 드디어 프리챌을 오픈한다.  2년 만에 1000만 명의 회원을 끌어 모으며 하루 접속자 180여만 명을 넘는 등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다음, 야후 등과 함께 국내 포털 빅3로 불리기도 했다. 2001년 4월 게임맥스를 인수하면서 드림챌이라는 게임 개발사를 만들고, 2002년에는 주 수익모델이 된 파일구리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프리챌은 점점 성장했다. 2년 만에 직원도 300명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프리챌은 벤처 열풍의 주역이 되었다.

2002~2003년 드라마 같은 프리챌의 정권교체
하루가 다르게 커뮤니티가 늘어가고 프리챌은 서버를 구축하는 등 하드웨어 장비를 정비하는 데만도 300억이 넘게 들었다. 하지만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금이 돌지 않으면서 벤처 업계도 얼어붙은 것이다.  
2002년 11월, 상황 돌파를 위해 프리챌은 커뮤니티 유료화를 도입한다. 커뮤니티 운영자들에게 매월 3000원을 받기로 했다. 유료화를 시작하는 날 사이트에서도 밝혔지만 좋은 서비스로 보답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약간의 이탈자는 있겠지만 회원의 10분의 1만 유료회원이 되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 10만 명 정도가 유료회원으로 돌아서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료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느 사이트처럼 배너 광고를 달고 이용료를 면제 받을 수도 있었다. 파일구리와 연동하면 실질적으로는 공짜인 곳도 많았다. 당시 벤처 업계들은 프리챌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자신들도 유료화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기가 조금 빨랐다. 지금은 대부분의 음악 파일이나 동영상 콘텐츠가 돈을 주고 봐야 하는 등 저작권이 많이 강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소프트웨어를 공짜로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회원들이 늘어나지 않고, 커뮤니티의 특성상 단체로 이동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커뮤니티 활동이 떨어지고 추가 이탈이 이어지면서 방문자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미니홈피와 일촌을 내세운 싸이월드는 평생 무료를 선언하고 신규 이용자와 함께 프리챌의 회원들까지 흡수했다. 게다가 전제완이 증자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유료화 한달 만에 구속되면서 연일 언론에서는 유료화 실패와 함께 이 일을 보도하며 프리챌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다.

동영상 서비스로 갈아입은 프리챌
우여곡절 끝에 경영권은 교체되고 프리챌은 2004년을 ‘제2의 도약의 해’로 삼고 우지형 대표 체제로 무료 커뮤니티 서비스를 다시 시작한다. 그동안 유료였던 커뮤니티 서비스를 광고를 다는 조건으로 무료로 전환했다. 유료 커뮤니티는 프리미엄 서비스로 남겨두어 커뮤니티 내 광고가 모두 삭제되고 300MB의 대용량 제공, 꾸미기 아이템, 통계 기능 등으로 고급화시켰다. 다행히 프리챌 커뮤니티의 향수를 잊지 못하던 많은 이용자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으나 예전의 영광을 찾기는 역부족이었다. 소그룹 커뮤니티 ‘섬’과 커플 포털 ‘커플iN’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시스템을 제대로 업데이트하지 못해서 문제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2005년 7월에 취임한 손창욱 대표는 포털이 독점한 인터넷 시장에서 커뮤니티 서비스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프리챌의 성격을 바꾼다. 손창욱은 인터넷 미디어의 변화가 텍스트에서 이미지, 더 나아가 동영상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동영상 포털을 선언하고 2006년 5월에 포털 사이트 최초로 동영상 서비스 QTV를 오픈한다. 그 결과 프리챌은 7년 만에 흑자로 도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 프리챌 게임 사이트를 새롭게 단장하고 <큐로큐로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하는 등 입지를 굳혀 나갔다. 하지만 또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음란물과 불법 복제물 유포를 방조한 혐의로 프리챌 대표가 2009년 4월 1일 불구속 기소된 것이다.  2006년 1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프리챌 사이트에서 2만여 건, 파일구리에서 1만1000여건의 불법 유통이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다. 프리챌은 이용자들끼리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만을 제공했다는 입장이지만, 검찰은 실제 유통되는 파일 상당수가 음란물이고 포인트제도 운영 등으로 프리챌이 음란물 유통을 조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쯤이면 사이트가 빛을 보려고 할 때 장애물이 나타나는 것이 프리챌의 운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수긍이 된다. 

기자의 말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을 이용한 사람이라면 하나 이상의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을 공유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후 ‘아이러브스쿨’이나 ‘다모임’ 같은 사이트가 생겨났으나 지금은 싸이월드만 남았다. 싸이월드는 커뮤니티라는 특성은 비슷하나 프리챌에 대면 한없이 작은 규모일 뿐이다. 프리챌은 이미 추억의 서비스다. 과거의 영광은 지워버리고 새롭게 동영상과 게임 퍼블리싱에 뛰어들었으나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루가 멀다하고 변하는 곳이 IT 시장이다. 어떤 것도 예측하기 힘들다. 프리챌에 대한 기대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다른 사이트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검색을 버리고 과감히 커뮤니티를 택했던 도전과 결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프리챌의 경영진이 바뀌면서 창업자와 프리챌 초기 멤버들은 모두 프리챌에 등을 돌린다. 
전제완 프리챌 창업자와의 인터뷰를 간단하게 Q&A로 정리했다.


프리챌 창업자 전제완.

Q. 프리챌 유료화 실패로 창업자가 구속되고 회원들이 떠나갔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A. 순서가 바뀐 것 같다. 프리챌의 유료화가 중단되고 다시 무료로 전환된 것은 내가 구속되고 모든 환경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이다. 프리챌의 유료화 당시 10만 명 정도의 프리챌 커뮤니티 운영자들이 2달간 이미 유료로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다. 단지 2002년 10월 1일 프리챌 유료화 이후 불과 2달만인 2002년 12월 3일 내가 갑작스럽게 구속되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구속된 후 일어난 많은 일들에 대해 구속 중인 나는 몰랐었다. 2년간 복역한 뒤 출소해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6개월간 재조사 하면서 놀랄만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Q. 갑자기 유료화를 진행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A. 당시 프리챌에서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고객의 입장에서는 고객 개인의 추억을 담보로 돈을 벌려고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물론 고객의 입장에서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프리챌은 3위 포털이었지만 극심한 벤처 투자 환경이 위축된 상황에서 더 이상 포탈로서의 경쟁은 무리라는 판단을 했다. 결국 당시 나는 프리챌을 광고수익에 의존하는 미디어 포탈이 아닌 양질의 소프트를 개발하는 플랫폼 회사로 변신을 꾀한 것이다. 개인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해 주는 진정한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커뮤니티 플랫폼이 되면, 프리챌 고객은 월 3천원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무료로 이용하는 것에 익숙해 처음에야 거부감이 있겠지만 결국 그 가치를 인정해 줄 것으로 믿었다. 만약 내 생각대로 진행되었다면 프리챌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서비스하는 글로벌 인터넷 기업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Q. 유료화 이후 어떤 방식으로 프리챌을 이끌어 나갈 생각이었나
A. 당시 자금부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대기업에 M&A를 추진 중이었다. 당시 KT는 한미르와 하이텔을 통합하는 새로운 포털을 준비 중(지금의 파란닷컴)이었기에 프리챌 인수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협상이 몇 개월 진행되었지만 생각보다 진행이 늦어져 SK그룹과 타 기업과도 협상을 병행해서 진행했다. 대기업에 프리챌이 합병되면 프리챌의 우수인력과 기술 그리고 대기업의 인프라와 자본을 결합해 한국 최고의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개발하여 한국 시장이 아닌 세계로 나갈 계획이었다.

Q.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구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A. 2002년 12월 3일 아침 한양대 강의가 있어 집을 나서다 검찰에 긴급체포가 되었다. 나는 긴급체포되는 그 순간까지도 검찰에 가서 단 한 차례 조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정말 아침에 일어나니 감옥이었다. 검찰에 가서야 비로서 내가 무엇 때문에 체포되었는지 알게 되었고 담당 검사에게 현재 프리챌이 절대절명의 상황이고 또한 대기업과 합병 협상을 진행중이기에 모든 혐의를 인정할테니 불구속 재판을 받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프리챌의 생존을 위해 급하게 난 프리챌과 관계사를 매각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난 2년간의 실형을 선고 받고, 2년 복역 뒤 2004년 11월 30일 여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출소한 후 내게 남은 것은 250억의 부채와 불명예 뿐이었다.

Q. 복역 중에 프리챌의 인수가 결정되었다. 어디까지 개입되어 있는지?
A. 내가 구속된 후 나를 대신해서 프리챌 매각 협상을 한 것은 우지형 사장이었다. 우지형 사장은 당시 코스닥 등록법인인 부직포 필터를 생산하는 프리챌홀딩스의 경영과 프리챌의 영업을 보강하기 위해 내가 모셔온 삼성의 직장 선배였다. 내가 구속된 뒤 난 프리챌의 매각 관련 딜을 우지형 사장에게 일임했는데 애초에 우지형 사장은 자신의 공군장교 동기이자 삼성입사 동기인 홍기태 당시 새롬기술 대표이사에게 매각을 제안하고 일방적으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프리챌을 헐값에 매각하면서 자신이 프리챌의 경영을 보장받고자 한 것 같다.

이러던 중 새롬과 MOU 직전인 200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SK텔레콤에서 새롬과는 비교도 안되는 월등히 나은 조건의 협상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SK텔레콤의 관계자와 우지형 사장은 프리챌 회의실에서 25일 오후부터 막판 협상을 하고, 다음날 26일 새벽에 SK텔레콤에 매각하기로 참석한 모두가 동의하였으나 우지형 사장이 이런 중요한 협상을 새벽에 사인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세면이라도 하고 아침에 싸인하자고 주장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하기로 하고 26일 아침 10시경에 프리챌 사무실에 SK관계자가 다시 찾아와 프리챌 매각 사인을 하고자 하였으나 우지형 사장은 불과 몇 시간 전의 입장을 바꾸고 새롬기술과 협상할 것을 주장했다.

Q. 그래도 대표인데 이 일을 전혀 모르진 않았을텐데.
A. 감옥에 있던 나는 전혀 25일 크리스마스날에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공휴일에는 면회가 되지 않으니 구속 중인 내가 어떻게 그 내용을 알 수 있겠는가? 26일 우지형 사장은 내가 있는 서울구치소로 변호사를 보내 25일 일어난 SK 협상 내용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채 26일, 27일 두차례에 걸쳐 나에게 보석 신청을 위해 ‘대표이사 및 이사 사임, 모든 협상의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내가 만일 새롬측과 MOU를 깨면 개인적으로 50억이나 위약금을 물게 되니 MOU에 싸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나는 25일, 26일 SK측과 일어난 일을 전혀 보고 받지 못한 채 우지형 사장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인을 해 주었다. 실제 협상 내용은 27일 날 오후에 당시 프리챌홀딩스의 사외이사와 관련자들이 SK딜을 설명하러 서울구치소로 특별면회를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새롬과 MOU에 싸인한 뒤였다. 그 짧은 순간에 나를 철저히 속이고 우지형 사장이 모든 협상을 마무리한 것이다.

Q.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인가.
A. 프리챌에 근무했던 인재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최고의 인력들이었다. 벤처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새롬기술(현 솔본)으로 인수된 뒤 1년도 안 되어서 200명의 프리챌 인력 중 80%가 그만 두었다. 그 인력들은 현재 NHN에 많이 가서 일하고 있고, 전부 인터넷 업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인력을 보호하지 못한 프리챌은 더 이상의 성장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공전하다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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