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코리아’ 한국 떠나는 DVD 직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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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코리아’ 한국 떠나는 DVD 직배사들
  • PC사랑
  • 승인 2008.12.2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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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어설프지만 나름대로 영화광의 기질을 보였던 기자는 불과 몇천원 되지 않는 용돈을 아끼고 아껴 모으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부모님께 참고서나 학용품이 필요하다는 거짓말로 돈을 타내 변두리 재개봉관의 죽돌이로 살았던 적이 있다. 시내 개봉관까지 가자면 노선도 잘 모르는 버스를 한 시간 넘게 타고 가야 했고, 특히 재개봉관의 두 배가 넘는 관람료는 어렸던 기자에게는 넘기 힘든 자본의 벽이었다. 당시 재개봉관(실재로는 ‘삼류극장’이란 말이 더 많이 쓰였다)은 개봉관의 절반 값에 두 편의 영화를,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온종일 볼 수 있어 ‘헐리우드 키드’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던 곳이다. 물론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불이 켜지면 드러나는 온갖 쓰레기와 시궁창 같은 악취는 감내해야 했지만 말이다. 극장에 갈 형편이 못되면 비디오 플레이어가 보급률도 얼마 되지 않던 시절이라 ‘남들보다 좀 산다’는 친구네 집에 또래 대여섯 명이 모여 비디오를 보곤 했다. 처음으로 봤던 것이 <레이더스>였던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1980년대 ‘비짜 시대’를 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당시는 ‘3S정책’이라고 해서 ‘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대변되는 포퓰리즘이 횡횡하던 시절이었다. 전국 극장에 걸린 영화 가운데 절반이 애로영화였을 정도로 야한 영화가 정말 많았는데, 재개봉관에서는 어지간히 어리지만 않으면 18금 영화도 별 문제 없이 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기자는 비슷한 나이또래 중에서 <애마부인 2>를 극장에서 본 몇 안 되는 불량(?) 청소년이었다.
시시하고 썰렁한 이 이야기는 막 10대에 접어든 변두리 소년의 호기심과 어른들의 불량스런 욕심이 빗어낸 1980년대의 풍경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80년대 중반부터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 사이에는 외국의 최신 영화를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거나 앞서 출시된 것을 복사해 파는 ‘비짜 비디오’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해적판으로 불리는 불법복제물들이 암묵적으로 유통되었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심지어 만화방이나 허름한 건물에서 돈을 받고 이를 몰래 틀어주는 곳까지 우후죽순 생겨났다.
불법비디오는 이후 10년이 훨씬 넘도록 우리들 일상의 음지를 떠돌며 유행을 거듭하다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춰가고 있다. 바로 디지털 영상 콘텐츠인 DVD가 나오면서다. 하지만 비짜 비디오가 나돌 때 잘못된 싹을 철저하게 고르고 뽑아내지 않은 탓이었을까? 한국의 2차 영화 콘텐츠 시장의 오늘은 어쩌면 1980년대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을 밟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불법 다운로드의 철옹성 된 한국

지난 11월 11일 오후 1시. 점심을 막 먹고 쌩쌩 달리는 차들 틈에서 신호등도 없는 국회의사당 앞 8차선 도로를 막 건너가던 참이었다. 워너홈비디오코리아(이하 ‘워너’)의 홍보대행사 직원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국내 최대 규모의 DVD 타이틀 출시를 자랑하던 워너가 한국시장 철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적잖이 놀랐지만, 솔직히 워너의 철수는 업계에 눈이 조금만 트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외국의 대형 직배사가 한국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한국 DVD 시장은 이미 급격한 하양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해 3월 과감히 철수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유니버셜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마치 그동안 누군가 먼저 나서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직배사의 철수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같은 해 8월에 파라마운트가, 12월에는 폭스가 우리나라를 떴고, 2008년 들어서는 디즈니의 작품을 출시하는 브에나비스타가 3월 철수를 감행했다. 워너와 함께 황량한 한국 DVD 시장을 감내하던 소니가 철수를 공식 선언하기 며칠 전, 기자는 워너 마케팅팀의 강명구 부장과 인터뷰를 했었다. 기자의 질문에 자꾸만 한숨을 먼저 보이던 그의 속내에는 머잖아 감행될 철수를 염두에 둔 설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01-02> 2007년 국내 최고의 흥행작인 <디워>의 DVD·비디오의 판매량은 1만7천 장. <캐비리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은 미국에서만 1천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마지막 주자 워너, 12월 이후 한국 철수
1999년 9월 한국에 진출해 그동안 여러 선두업체들과 함께 국내 DVD 시장을 선도했던 워너가 만 10년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마지막 남은 직배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까닭은, 그렇다. 불법 다운로드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나 음악, 그밖에 다른 온라인 콘텐츠들도 마찬가지지만 영화계, 특히 2차 콘텐츠 시장인 DVD쪽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달했다.
인구수와 1인당국민소득, 그리고 문화적 환경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의 올해 DVD 판매량과 우리나라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하늘과 바닥을 오간다. 2007년 미국에서 출시된 DVD의 총판매량은 1위인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이 1천166만 장, 2위인 <트랜스포머>가 1천56만 장이다. 사상 최악의 금융위기를 맞은 올해는 작년보다 수치가 줄긴 했지만 11월 현재 <아이언맨>이 749만 장을 넘겼고, 2위인 <나는 전설이다>도 596만 장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2006년 판매율 1위를 차지한 <All About 동방신기>가 고작 4만7천186장이 팔렸다. 미국과 달리 소장문화가 부재한 것도 원인이지만, 그보다 먼저 콘텐츠 가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 자체가 판이하게 다른 게 가장 크다.
한국영상산업협회가 밝힌 국내 비디오와 DVD 시장의 매출액을 보면 2003년 비디오가 1천13억 원, DVD가 1천억 원이었던 것이 2005년 들어 478억 원과 700억 원으로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50%가 넘게 떨어졌다. 올해 예상치는 비디오 150억 원, DVD 200억 원으로 5년 전의 1/5의 수준이 될 것이라 한다. 하반기에 이어진 직배사 철수가 앞으로 국내 제작사들과 DVD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 영화 한 편에 불법 다운로드 60만 건

불법 다운로드는 1차 시장인 극장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미친다. 최근 <쏘우 V>를 수입해 배급하고 있는 성원아이컴의 발표에 따르면 그들이 수입한 <집결호>가 60만 건 이상 불법으로 다운로드되어 피해 금액을 산정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국내외 다른 영화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좀더 유명세를 탄 영화일수록 불법 다운로드 수치는 급격하게 올라 간다.
물론, 직배사들이 철수한다고 해서 외국의 DVD 타이틀이 국내 시장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종전에 직배사들이 내놓던 DVD와 블루레이 타이틀들은 팬텀 엔터테인먼트, 아트 서비스 등이 국내 제작/유통사들이 출시를 대신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작사와 소비자가 소통할 장벽이 몇 단계 더 두터워졌음을 의미한다. 타이틀의 질은 점점 더 떨어질 것이고, 그에 실망한 소비자는 DVD 구입을 더 망설이게 될 것이다. 요즘은 아예 IPTV에서 영화를 녹화한 뒤 이를 인코딩해 퍼뜨리는 사람들까지 생겼으니 업체들이 대안으로 삼은 다운로드 서비스도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워너의 마지막 인사

워너의 이현렬 대표는 철수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워너홈비디오코리아는 그 동안 양질의 비디오/DVD를 가장 쉽게 또 가장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도록 전 방위적인 노력을 다해왔다. DVD를 구매했을 때 뿌듯함을 느끼는 소비자를 떠올리며 제품제작부터 유통/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최고를 지향해왔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변화에 적응하고 앞서나가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소비자의 구매형태는 뛰어난 디지털 인프라를 기반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앞으로도 워너는 국내 시장의 선도기업이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양질의 콘텐츠가 합법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건강한 시장을 만드는데 노력할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이것이 왠지 앞으로의 변화화 혁신에 대한 포부가 아닌 떠나는 자의 감회로 측은하게 들리는 것은 과연 기자뿐일까?



인터넷에 밝은 불법 다운로드계의 영화광(?)들이 10년쯤 지난 뒤에 2008년을 어떻게 회상할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화를 내 맘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 하하.” 하며 2차 영화 콘텐츠 시장이 사라진 황폐한 대한민국을 쓴웃음으로 곱씹고 있지는 않을까? 1980년대에 미처 몰랐다면, 1990년대라도 우리는 비짜 시장의 말끔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후회는 빠를수록 늦은 것이고, 반성은 늦을수록 빠른 것이라고 했다. 지금이 바로 불법 다운로드와 해적판의 공격에서 소중한 콘텐츠를 지켜내야할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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